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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스승 김란사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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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스승 김란사의 생애와 업적
  • 중앙매일
  • 승인 2016.03.0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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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 미국 웨슬리안대학교 입학 당시 (사진제공: 친정조카손자 김용택씨)

올해 3ㆍ1절을 기준으로 국가보훈처에서 훈ㆍ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4329명, 이 중 여성은 달랑 272명(1.9%)에 지나지 않는다. 보훈처에서 발굴한 전체 여성 독립운동가 규모(2747명)에 비하면 포상은 10%에 불과하다. 자료가 부족하거나 행적이 확인되지 않아 포상에서 제외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일제강점기부터 강고했던 남성중심의 사회구조로 인해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이 저평가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훈ㆍ포상을 받은 여성 독립유공자 272명 중 한국 국민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장렬히 순국(殉國)한 유관순 열사(烈士)이다. 최근 한국인들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커졌지만, 광복 70주년이 지나도록, 일반인들에게 ‘여성 독립운동가=유관순’이라는 공식만 통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관순 열사 외에 생각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별로 없다.


김하란사(金河蘭史, 본명 : 金蘭史, 1872~1919)는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재학할 때 스승으로 3ㆍ1운동을 태동시킨 주역이었다. 이화학당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이끌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과 세계 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유관순 열사도 그 중 하나였다. 제자였던 유관순 열사에게 이문회 가입을 권유한 뒤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돼 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최초의 여학사, 하란사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논문을 쓴 고혜령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이화학당 학생들이 3ㆍ1만세 운동을 주도한 데에는 하란사의 영향이 컸다”고 평가했다.


김란사는 고종 9년인 1872년 평양의 전주김씨 문중에서 김병훈과 이씨 부인 사이에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서울 평동(平洞) 32번지에서 거주(居住)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아버지의 무역업을 도우며 자랐다. 그러다가 다시 인천으로 이주(移住)하였다. 1893년 인천에서 감리(監理)로 활동하고 있던 하상기(河相驥)와 혼인하였는데, 김란사는 개화기의 신여성으로서 학구열(學究熱)이 대단하여 밤중에 당시 기혼자는 입학할 수 없는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직접 찾아가서 프라이(Lulu E. Frey) 학당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입학하였다.


고종 31년인 1894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여 1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그 이듬해인 1895년 3월 한국 여성 최초로 일본유학의 길에 올랐다.


김란사는 처음에 자비(自費)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공부하였는데 5월에 100여명의 관비유학생들이 파견된 사실을 알게 되어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자신도 관비유학생들과 같은 감독을 받기를 원한다고 청원하였다.


이완용이 김란사의 청원을 수용하고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청원내용을 알렸으며, 이를 다시 일본공사에게 전달하여 결국 김란사는 관비유학생들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김란사는 게이오의숙(慶應義淑)에서 1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건양 1년인 1896년에 귀국하였다.


광무 1년인 1897년에 미국유학의 길에 올라 처음에 워싱턴 D.C에 위치한 하워드 대학교에서 신학(神學, theology)을 공부하고, 워싱턴에 있는 데코네스 학원에서도 수학했다.    


1900년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웨슬리안 대학교(Wesleyan University) 문과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이수하고 1906년에 대망(大望)의 졸업을 하면서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신학) 학위를 수여받았다.


김란사는 당시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의친왕 이강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종황제가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과 김란사를 밀사(密使)로 파견하였다고 한다.


김란사는 광무 10년인 1906년 마침내 10여년의 미국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남대문 상동감리교회에서 스크랜튼(Mary F. Scranton) 대부인이 설립한 영어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이 학교는 불우한 형편의 여성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기혼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학교였다. 이 학교는 이후 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에서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이 됐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김란사가 11세가 되던 해인 1885년(고종 22)에 조선에 입국했다.    1894년(고종 31)에 김란사가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여 스크랜톤 대부인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김란사는 스승인 스크랜톤 대부인이 과부, 기생, 첩, 궁녀 등 불우한 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영어학교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면서 여성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07년부터 그는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총교사(현재의 교감에 해당됨) 및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엄격히 지도하였다. 그리고 동년(同年) 이화학당(梨花學堂) 교사였던 이성회가 조직한 이문회(以文會)라는 학생단체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 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909년 경희궁에서 대한부인회, 자혜부인회, 한일부인회, 서울시내 각 여학교가 연합하여 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김란사, 박에스더, 윤정원을 위한 성대한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그 때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종황제로부터 은장을 수여받았다.


1910년 9월 이화학당(梨花學堂)안에 대학과가 신설되면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실시되었을 때 김란사는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교수로 취임하여 4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편 부인성서강습, 교회활동, 어머니 육아교실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앨버슨과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여 거리와 농촌으로 나가 전도하는 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1911년부터는 매일학교, 애오개여학교, 종로여학교, 동대문여학교, 동막여학교, 서강여학교, 왕십리여학교, 용머리여학교, 한강여학교에서도 지도교사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릴 만큼 교육에 있어 엄격했다는 김란사는 남편이 하인을 보내 끼니를 챙길 정도로 신여성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그의 여성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슬기로운 어머니, 나라를 위해 훌륭한 자식을 키울 수 있는 어머니, 능력 있는 여성을 배출하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여성 독립투사를 양성하는 데에 있었다.


1916년 미국 뉴욕 주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 신흥우 박사와 함께 참석하였다. 1개월 간의 회의가 끝난 이후에도 홀로 남아서 순회강연을 하며 해외 교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8년에는 20여 년 동안 친분관계를 맺어왔던 도산 안창호의 도움을 받아 순회강연에서 모금한 돈과 하와이 교포들의 주선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하여 정동교회에 설치하였다.


일본시카고 영사가 1917년 9월 19일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기밀문서에 김란사가 1917년 9월 20일 의친왕의 처남 김춘기를 비롯하여 조선인 청년 수명(數名)을 인솔하고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라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21세 때 김춘기는 미국에 건너가 네브라스카주 오마하로가 연합태평양철도회사에서 서기로 1년 동안 근무하다가 캘리포니아주 포클리시 캘리포니아 관립대학교 상과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고 대정(大正) 6년 10월 13일 경성으로 돌아와 원적지로 돌아갔다."


이와 관련하여 김춘기는 의친왕의 최측근으로서 2년 후에 추진하는 의친왕 망명 미수 사건에도 깊이 관련되었던 인물이다. 


김란사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국권회복을 위하여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능통한 영어실력으로 여러 선교사들과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궁궐에 자주 입궐하면서 고종황제의 통역도 하였고, 엄귀비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김란사는 엄귀비에게 대한제국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멀리하고 미국과 친분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여성교육을 위하여 근대적인 학교를 많이 세워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여 엄귀비가 진명(進明), 숙명(淑明) 여학교(女學校)를 설립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종황제는 1918년 6월 의친왕과 김란사를 파리강화회의에 극비리에 밀사(密使)로 파견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함, 조선의 억울함 등을 알리고, 민족의 독립의지를 표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정동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였던 손정도 목사를 비롯하여 현순 목사와 최창식에게 두 밀사(密使)를 파리까지 안전하게 안내하라는 밀명(密命)을 내렸다. 그런데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뜻밖에 붕어(崩御)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김란사는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한 투철한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손정도 목사를 만나러 베이징(北京)행을 단행(斷行)하기로 결심하고 기회를 엿보던 중, 1919년 1월말에 국경을 넘어 2월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김란사를 만나러 상해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온 손정도 목사가 건강이 악화되어 합달문내(哈達門內)에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가영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김란사를 결국 만나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김란사가 동포들이 마련해 준 환영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으로 인하여 1919년 4월 10일 베이징(北京) 협화의원(協和醫院)에서 향년(享年) 45세를 일기(一期)로 서거하였다.
당시 장례식에 참석하였던 미국 성공회 책임자 베커가 김란사의 시신(屍身)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증언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김란사는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이 분명하다.


국가보훈처는 1995년 자체 연구 끝에 “여성의 애국정신을 고취했다”는 공로를 인정,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훈장은 14년 동안 보훈처 캐비닛 안에 잠자고 있었다. 유일한 혈육이던 친딸이 18세에 사망해 남은 직계혈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09년에야 남편(하상기) 전처의 후손이 김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수소문해 우연히 훈장 수여 사실을 알게 됐다. 김란사 남동생의 손자인 김용택(68)씨는 “고모할머니의 활약은 어릴 때부터 무수히 듣고 자랐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을 꺼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강해 집안에서도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혜령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비운의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는 유관순 열사처럼 주목 받아야 할 여성독립운동가”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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